2026-04-28
나이 들어 시작해도 늦지 않다
이규웅 · 대금 연주자 · 죽관악기 기능계승자
봄에 심는 나무만 나무가 아닙니다. 가을에 심는 나무도 있습니다. 심는 철이 다를 뿐,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국악원에 오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걱정이 이 나이에 시작해도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웃으며 제 이야기를 해 드립니다. 저야말로 가을에 심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국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대금과는 상관없는 길을 걷다가, 뒤늦게 이 소리에 사로잡혀 영남대학교 국악과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까지 마쳤습니다. 남들이 한창 연주자로 자리 잡을 나이에 저는 신입생이었습니다. 그 낯설고 조마조마하던 심정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어린 동기들 사이에서
늦깎이 학생의 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입니다. 손가락은 어린 동기들처럼 빠릿하지 않고, 외워야 할 가락은 산더미 같았습니다. 그러나 늦게 시작한 사람에게는 그만의 무기가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습니다. 절실함입니다. 돌아갈 길을 접고 온 사람은 하루하루를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무기는 살아온 세월 그 자체입니다. 산조는 사람의 희로애락을 담는 음악인데, 희로애락은 책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젊은 손가락은 따라가지 못해도, 늦게 시작한 사람의 가슴에는 이미 가락에 담을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기교는 세월이 채워 주지만, 사연은 세월만이 만들어 줍니다.
늦게 심은 나무가 맺은 열매
그렇게 시작한 길에서 저는 2004년에 국가무형유산 제45호 대금산조 이수자가 되었고, 같은 해에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죽관악기 기능계승자로도 지정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대금 연주로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늦게 심은 나무도 열매를 맺더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그때 나이를 핑계로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아마 지금쯤 대금 잘 부는 사람을 부러워만 하는 노인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시작하지 않은 사람에게 세월은 그저 흘러가지만, 시작한 사람에게 세월은 차곡차곡 쌓입니다. 같은 십 년이 전혀 다른 십 년이 됩니다.
취미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물론 모두가 전공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국악원에서 만나는 어르신 수강생들 중에는 오로지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부는 분들이 많습니다. 손주 앞에서 한 곡 부는 것이 목표인 분도 계시고, 산에 올라 혼자 부는 것이 낙인 분도 계십니다. 그 소리들이 무대의 소리보다 못하다고 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대금은 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호흡을 다루는 이 악기가 건강에 보약이 된다고들 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망설이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올가을에 나무 한 그루 심는 마음으로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마음이, 사실은 가장 절실한 출발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