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5
임계점
이규웅 · 대금 연주자 · 죽관악기 기능계승자
모든 것에는 임계점이라는 게 있습니다. 물도 끓는점까지 올라가야 끓기 시작하듯이, 대금을 부는 일도 마음만 앞서면 몸이 따라오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합니다. 몸도 고달프고 정신도 어느 정도 힘이 들어야, 그 고비를 지나서야 비로소 소리가 몸에 붙습니다. 구십구 도까지 데워 놓고 그만두면, 물은 끝내 끓지 않습니다.
주전자를 불에 올려 두고 지켜본 적이 있으신지요. 한참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속에서는 분명히 온도가 오르고 있는데, 겉으로는 잠잠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닥에서 작은 기포가 올라오고, 이내 온 주전자가 요란하게 끓습니다. 변화는 그렇게, 오래 잠잠하다가 한꺼번에 옵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시간
대금을 배우는 과정이 꼭 그렇습니다. 처음 몇 달은 소리조차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입술이 아프고,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고, 숨은 왜 그렇게 빨리 동나는지요. 열심히 하는데도 어제와 오늘이 똑같아 보이니, 사람이 지치기 시작합니다. 이 잠잠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주전자를 불에서 내리는 분들을 저는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자리에서 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본인은 제자리라고 생각하는 그 시간에도 물은 데워지고 있습니다. 입술의 근육이 자리를 잡아 가고, 호흡이 조금씩 길어지고, 귀가 열려 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가 임계점에 이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낙심한 제자에게 늘 말합니다. 지금 그대의 물은 몇 도쯤 되었는지 그대만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몸이 고달파야 넘는 고비
임계점을 넘는 데에 요령이 없지는 않지만, 요령만으로 넘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몸이 고달프고 정신이 힘들어야 합니다. 마음만 앞서고 몸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는데, 사실 그 스트레스야말로 물이 데워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오히려 불이 꺼진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저 자신도 그런 고비를 여러 번 넘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뒤늦게 국악의 길로 들어선 사람입니다. 남들보다 늦은 만큼 마음은 급한데 몸은 더디니, 그 답답함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때 스승님들께 배운 것이 바로 이 임계점의 이치였습니다. 조급해하지 말고 불을 꺼뜨리지만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끓고 나면 다시 잠잠해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임계점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첫 소리가 나는 임계점이 있고, 청 울림이 트이는 임계점이 있고, 산조 한바탕을 제 것으로 삼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하나를 넘으면 또 잠잠한 시간이 오고, 그 시간을 견디면 또 한 번 끓습니다. 평생을 불어 온 저도 여전히 다음 임계점 앞에서 물을 데우는 중입니다.
그러니 지금 대금이 늘지 않아 속이 상하신 분이 계시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데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연습은 눈에 보이지 않는 1 도쯤의 온도입니다. 그 1 도가 모여서 어느 날 문득, 그대의 대금이 끓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