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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1

블랜딩의 시대에 맞는 대금

이규웅 · 대금 연주자 · 죽관악기 기능계승자

요즘 커피숍의 전성시대 같죠? 도처에 카페들로, 새로 생긴 대형 카페까지 그야말로 우후죽순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많은 카페들이 다 저마다 손님이 있습니다. 어떤 집은 뷰가 좋아서, 어떤 집은 넓어서, 어떤 집은 빵이 맛나서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커피 맛 하나만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습니다.

저는 그 풍경을 보면서 자꾸 대금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는 커피라고 하면 다방 커피 한 가지였습니다. 지금은 원두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어떻게 볶았는지, 무엇과 섞었는지에 따라 맛이 다 다릅니다. 블랜딩이라고 하지요. 서로 다른 원두를 섞어서 그 집만의 맛을 만들어내는 일 말입니다.

대금에도 블랜딩이 있습니다

대금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악의 아정함이 있고, 산조의 자유로움이 있고, 요즘은 창작 국악이니 크로스오버니 하는 새로운 흐름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길들이 서로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정악 하는 사람은 산조를 낮춰 보고, 산조 하는 사람은 정악을 답답해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담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한 연주자가 정악의 호흡을 바탕에 깔고 산조의 시김새를 얹기도 하고, 서양 악기와 나란히 서서 연주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타락이 아니라 블랜딩이라고 봅니다. 좋은 원두들이 만나서 새로운 맛을 내듯이, 좋은 전통음악들과 현재의 음악들이 만나서 새로운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다만 원두가 좋아야 합니다

물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블랜딩이 맛있으려면 섞이는 원두 하나하나가 좋아야 합니다. 싸구려 원두 열 가지를 섞는다고 명품 커피가 되지는 않습니다. 대금도 그렇습니다. 정악이면 정악, 산조면 산조, 자기 바탕이 되는 소리를 깊이 파고든 사람이라야 섞어도 격이 삽니다. 바탕 없이 섞기부터 하면 이도 저도 아닌 소리가 나기 쉽습니다.

저는 김동진류 대금산조를 오래 공부해 왔습니다. 그 가락을 몸에 새기는 데에 젊은 날을 다 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우물을 판 사람일수록, 오히려 다른 물맛이 궁금해지는 법입니다. 자기 우물이 깊은 사람은 남의 우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이유로 선택받는 시대

카페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손님을 맞듯이, 이제 대금 연주자도 저마다의 이유로 청중을 만나는 시대입니다. 어떤 이는 단단한 정악으로, 어떤 이는 절절한 산조로, 어떤 이는 새로운 음악으로 사람들을 부릅니다. 어느 길이 옳으냐고 묻는 것은, 어느 카페가 옳으냐고 묻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입니다.

다만 저는 후학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무엇을 섞든, 그대의 잔에 담기는 것이 결국 그대의 소리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입니다. 블랜딩의 시대는 개성의 시대이고, 개성은 흉내가 아니라 깊이에서 나옵니다. 오늘도 저는 공방에서 대나무를 다듬으며, 이 오래된 악기가 앞으로 또 어떤 맛을 낼지 즐겁게 궁금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