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2
쌍골죽 이야기 — 좋은 대금은 대나무에서 시작됩니다
이규웅 · 대금 연주자 · 죽관악기 기능계승자
겨울이 되면 저는 대밭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남들은 봄꽃을 기다리는 계절에 대금 만드는 사람은 찬바람 부는 대밭을 헤맵니다. 대나무는 물이 오르지 않는 겨울에 베어야 단단하고 뒤틀림이 적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금은 공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겨울 대밭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그런데 대금 재료로 치는 대나무는 곧고 미끈한 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쌍골죽이라고 하는, 양쪽에 골이 파여 자란 대나무를 최고로 칩니다. 대나무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병이 든 것입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해 골이 파이고, 그 대신 살이 두껍고 단단하게 여문 놈입니다.
병든 대나무의 역설
옛 어른들은 쌍골죽을 병죽이라 하여 대밭에서 보이는 대로 베어 버렸다고 합니다. 죽순이 제대로 크지 못하고 밭을 버린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대받던 대나무가 대금 재료로는 으뜸이 되니, 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습니다. 매끈하게 잘 자란 대나무는 속이 넓고 살이 얇아 소리가 가볍습니다. 골이 파이며 고생하고 자란 놈은 살이 두꺼워 소리가 깊고 묵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이 맞고, 맞지 않는 것의 차이입니다.
저는 이 역설이 사람 사는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순탄하게만 자란 소리에는 어딘가 얕은 데가 있습니다. 어려움을 견디며 여문 것들이 결국 깊은 울림을 냅니다. 대밭에서 쌍골죽을 만날 때마다 저는 이 나무가 견딘 세월에 먼저 인사를 하게 됩니다.
백 그루에서 한 그루
쌍골죽은 흔하지 않습니다. 대밭을 온종일 뒤져도 쓸 만한 놈 한둘을 만나면 다행입니다. 게다가 베어 왔다고 바로 대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늘에서 말리고, 진을 빼고, 뒤틀리는 놈은 골라내고 하다 보면 남는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백 그루를 베어 한 그루가 악기가 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방에 쌓인 대나무들을 보면 저는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저 나무들이 대밭에서 여문 세월이 여러 해이고, 제 공방에서 마르는 세월이 또 여러 해입니다. 그 세월을 기다려 주지 않고 서둘러 뚫으면 반드시 탈이 납니다. 악기 만드는 일의 절반은 손재주가 아니라 기다림입니다.
재료가 소리의 팔 할입니다
저는 1996년부터 울산에서 활동하며 대금을 만들고 또 가르쳐 왔습니다. 그 세월 동안 얻은 결론 하나는, 재료가 소리의 팔 할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같은 대나무라도 만드는 사람의 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손도 나쁜 재료에서 좋은 소리를 꺼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겨울이면 대밭으로 갑니다.
혹시 대금을 배우시는 분이라면, 자기 악기가 어떤 대나무였을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대밭 구석에서 골이 파인 채 남몰래 여물던 나무였을 것입니다. 그 나무가 견딘 시간 위에 그대의 연습이 얹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악기를 함부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